“내겐 음악이 노동…거기서 의미·철학 찾으려 발버둥”
“바닷속에 잠겨 있는 듯, 공간을 꽉 채우는 음향 찾으려 했다”
“나의 작곡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사람들의 이야기 듣는 것”
“음악은 모든 예술의 제일 친한 친구다. 모든 장르에서 음악을 필요로 한다. 그건 (음악을 하는) 내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마다 차이점이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해야 이 작품에서 가장 생명력을 갖게 될까 고민한다.”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거둔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등에서 인상 깊은 음악을 선보인 음악감독 정재일이 이번엔 창극 <리어>의 작곡가로 나섰다. 지난 2016년 <트로이의 여인들>에 이어 국립창극단과 함께하는 그의 두 번째 창극 작업이다.
이번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우리 고유의 언어와 소리로 풀어냈다. 극본을 집필한 배삼식 작가는 삶의 비극과 인간에 대한 원작의 통찰을 물(水)의 철학인 노자의 사상과 엮어냈다. 시간이라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려낸다. 특히 무대 세트엔 20톤의 물이 채워지고, 수면의 높낮이와 흐름의 변화를 통해 인물 내면의 정서를 표현한다.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정재일은 이번 작업에 대해 “바닷속에 잠겨 있는 듯, 공간을 꽉 채우는 음향을 찾으려 했다”고 밝혔다. 고요하지만 생동하는 물의 세계로 그려지는 이번 무대에 어울리는 소리를 만들고자 “물의 이미지를 많이 상상하며 몽환적으로 접근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전자음악으로 공간 전체를 감싸안는 음향, 고대로부터 내려온 듯한 소리를 내보려고 노력했다.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 가믈란이나 아악의 편종·편경 등 오래된 소리를 찾아보려 했다. 종소리같으면서도 물방울이 흩어지는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
그는 판소리 선율을 중심에 두고, 극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향을 위아래로 쌓아가는 작업을 진행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 뭔가 알 수 없는 음향이나 화성이 계속 쌓여서 퇴적한 듯한 질감을 가져가려 했다. 그게 극장 안을 꽉 채워서 무대의 미장센이 곧 음악처럼 보이고 들리도록 하려 했다.”
“나는 판소리나 전통음악을 대할 때 작곡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음향이나 서양적인 화성을 결합해 판소리 시김새나 선율의 독특함을 더 증폭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음향과 화성으로 텍스트와 선율이 더 잘 들리게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첫 창극 작업이었던 <트로이의 여인들> 당시엔 음악감독을 맡았지만, 이번엔 한발 물러나 작곡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정재일은 이번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작창을 맡은 소리꾼 한승석의 콘셉트에 철저히 따랐다고 했다. 노(老)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리어왕>이지만 창극 <리어>에선 30대 젊은 소리꾼 김준수·유태평양이 주역으로 나선다.
“한 감독은 많은 어법을 갖고 있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몸속에 무속과 농악, 타악 등이 전부 있다. 이는 다양한 음악적 해석을 만들어준다. 이번 작품에도 시조·무속 같은 음과 판소리 선율부터 가요·팝송 등 현대적 선율까지 있을 것이다. 또 젊은 소리꾼들이라 훨씬 더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었다. 부르고 나면 쓰러지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한 감독이 소리꾼의 극한을 실험하더라.”
밴드 ‘긱스’ 출신으로 대중음악과 클래식, 영화, 공연 등 경계 없는 음악을 해오며 ‘전방위 음악가’로 불려온 정재일은 판소리에 대한 깊은 애정도 드러냈다. 20여 년 전에 활동했던 국악 기반 그룹 ‘푸리’ 활동은 그가 전통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한 감독 역시 ‘푸리’ 출신이다. 정재일은 “당시 전통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판소리에 크게 매료됐다”며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판소리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사실 창극에서의 작곡은 뭔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서 큰 매력이 없다. 하지만 창극에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완성해서 이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는 게 굉장히 행복하다. 한 사람(소리꾼)이 엄청난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깊게 매료됐다. 위대한 성악가들이 피를 토하면서 내밀한 자기만의 이야기로 소화해 표현해내는 걸 보는 게 즐겁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으로 국내외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그는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계속적인 학습의 일환”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오징어 게임>은 처음 해본 시리즈라 긴 호흡을 학습했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님이 생각한 과녁의 정중앙에 맞기 위해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원동력으로는 “항상 초보자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기 때문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장르마다 임해야 할 자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늘 긴장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나의 작곡에서 중요한 첫 번째 작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년 넘게 음악 활동을 해온 그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정재일은 “음악은 생계수단이자 노동의 하나”라며 “다만 거기서 의미, 철학을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지점은 모두 가본 것 같다.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기보다는 이것들을 더 단단하게 하고, 감수성이 닫히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앞으로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주로 주인공이 따로 있는 음악을 해왔지만, 이제는 작곡가로서 음악이 주인공인 음악을 해보고 싶다. 지난해부터 이것저것 도모하고 있고, 올 가을엔 뭔가 열매를 맺어보자 생각하고 있다.”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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